Jiyoon Baek


번역


Redefining the Performance Arts Archive (2009)
Sarah Jones, Daisy Abbott, Seamus Ross
퍼포먼스 아트 아카이브를 재정의하기

퍼포먼스의 재현
퍼포먼스의 기록물에는 여러 목적이 있다. 하나는 사실을 담는 것으로,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 해당 이벤트가 일어났음을 기록하기 위한 데이터베이스 목록과 같은 것이다. 그 외의 것들은 다른 사람들이 퍼포먼스를 보거나 경험할 수 있도록 행위를 포착하는 것을 시도한다.

본 연구에서 퍼포먼스의 재현에 관해 논의할 때, 재현이라는 용어는, Geoffrey Yeo가 제시한 것을 따르는데, 재현은 대용물, 즉 “다른 것을 위한 지지체”와 같다. 정확히 퍼포먼스를 재현하기 위해서, 재현물은 한낱 사실을 기록하는 것보다 더 나아가야 한다. 본 논문은 퍼포먼스의 재현물이 퍼포먼스의 본질을 반영하고 사용자들에게 사건에 대한 경험을 고무시킨다고 주장할 것이다.

퍼포먼스의 본질을 정의하는 것은 퍼포먼스의 재현에 관한 모든 어려움에 뿌리를 두고 있다. 퍼포먼스는 라이브 이벤트로, 시간을 따라 지속되지 않는 상연(실행, 행위)이다. 이러한 특징은 많은 학자들로 하여금 퍼포먼스의 원칙적 성격으로 한시성을 꼽게 만들었는데, 예를 들어 페기 펠란은 퍼포먼스를 “사라짐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퍼포먼스 아카이빙의 관점에서 이 의미에 대해 돌아볼 가치가 있다. 퍼포먼스의 주요한 속성이 그것의 한시성에 있다면, 퍼포먼스를 아카이빙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헛된 일인가? 우리는 그것이 빠져나가는 바로 그 순간에만 무언가를 포착하려고 시도해야 하는가?

퍼포먼스의 일시적인 성격은 긴장감을 유발한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은 기록을 통해 이에 대응하고 싶은 급박한 욕망을 유발하는 한편, 이 과정에 내재된 상실은 결과에 대한 많은 불만들을 남긴다. 주로 제작되는 재현물들, 사진과 드로잉은, 불충분하고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자주 평가절하된다. 그것들은 사건에 대한 창문을 제공하지만 경험을 재창조하지는 못한다.

또한 퍼포먼스 기록물들은 행위 당시의 분위기와 행위의 경험과 참여를 반영해내지 못한다. 인간 경험의 대다수가 본질적으로 상호작용적이며, 경험 중심적이고 수행적이라고 할 때, 우리는 후세를 위하여 만들고 선별한 기록들을 통해 공정하고 믿을만한 버전의 과거를 제공할 수 있을까?

퍼포먼스 재현물을 아카이빙하는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그것들이 리허설이나 특정 퍼포먼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또는 그것들이 단순히 아이디어(개념)을 반영한 것이라해도 항상 명확하지는 않다. 이러한 기록은 비록 그것이 퍼포먼스의 한 측면만을 재현하는 매우 좁은 관점일지라도 접근 지점을 제공한다. 불가피하게 기록들은 또한 다수의 손실을 통합하고 추가한다. 퍼포먼스 원본으로부터 재현물로의 변환은 절대 1:1이 아니다. 주장하건대 만약 우리가 다수의 재현물을 만들어낸다면, 그것들은 전체적으로 우리를 포착하기 어려운 진실을 향해 가까이 가도록 만들어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재현물이 코스튬, 대본, 공간과 시점의 세부사항들을 단순히 반영하고 있는 것에 그친다면, 이 재현물들은 실제로 어느 정도로 퍼포먼스를 반영하고 있는 것인가?

수행자들은 이 문제로 고심해왔다. Sophia Lycouris는 우리가 창조한 재현물을 원형을 재구축하기 위한 시도라기보다는 “관심사의 기록된 목록”이라고 보았다. 그녀는 퍼포먼스 재현물이 실제를 반영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퍼포먼스의 본질을 포착하길 바랬다. 만약 퍼포먼스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 퍼포머와 관객 사이의 관계에 있다면, 우리는 음악 악보의 라인에 따라 기록을 만들어야할 것이며, 이는 해석될 때 사용자의 경험을 다시 고무시킬 것이다. 다른 주장으로 리즌(Reason)은 기억(memory)이 퍼포먼스의 기록을 위한 가장 적절한 장소라고 보았는데, 그 이유는 기억의 유동성과 오류를 범하기 쉬운 점이 퍼포먼스의 본질과 가장 가깝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퍼포먼스 아카이브가 이러한 우려에 대응해야한다면, 아카이브에 들어가는 고정된 기록의 상태를, 진본임을 주장하는 전통적인 아카이빙에 대한 접근 방식을 재고해야만 한다. 퍼포먼스는 지속적으로 진화하고 있기 때문에 퍼포먼스를 캡쳐하고 고정하는 방법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에 더하여 하나의 관점 또는 해석이 다른 것들보다 중시되거나 아카이빙됨으로써 유일한 권위가 있는 설명으로 제시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포스트모던 아카이브 사상가 Cook과 Harris와 마찬가지로, Auslander와 Reason과 같은 퍼포먼스 학자들이 강력히 반대하고 있는 요소이다. 퍼포먼스 아카이브의 역할에 대해 논의하자면, 우리는 퍼포먼스가 그 자체의 사라짐으로 정의된다는 시작 전제를 재고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Diana Taylor는 그녀가 아카이브라고 칭하는 의도적으로 구축된 물질적 재현(종이 계획표와 사진들)과 그녀가 레퍼토리라고 칭하는 기억과 같은, 마음과 신체 그리고 공간에 새겨진 보이지 않는 기억과 같은 것들을 구분한다. 만약 우리가 퍼포머들의 특징적 실천과 체화된 지식의 발전을 고려한다면(즉 본능과 충동 그리고 무의식적인 반응을 기반으로 형성되고 우리의 경험에 의해 지속적으로 모습을 갖춰가는 불분명한 지식), 퍼포먼스에서 각각의 인스턴스화 자체는 끊임없이 그 자체로 돌아오는 지속적인 창조적 과정의 단순한 한 부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지속적인 재-상연의 상태에 놓인 비물질적인 흔적을 식별하는 것은 퍼포먼스가 사라진다는 개념에 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벤트가 남긴 물리적 흔적과 같은 프로덕션 스틸, 비디오 레코딩 그리고 대본과 같은 고정된 스냅샷을 포착하는 식의 접근이 문제화된다. 만약 퍼포먼스가 아키비스트의 개입 없이, 비물질적인 흔적 속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잔존물들이 퍼포먼스 아카이브의 일부를 형성하도록 허용할 수 있을까?

아카이브
우리가 레퍼토리를 보존하는 것에 관하여 이야기 할 때, 우리는 불변하고 객관적인 기록이라는 개념을 가진 아카이브의 전략과 언어에 기대는 경향이 있다. 비물질적 기표는 스토리텔러의 비디오 레코딩과 같은 쉽게 관리되는 오브제로 옮겨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퍼포먼스 자체는 포착되지 않고, 레코딩(기록)은 펠란이 언급했듯, “퍼포먼스가 아닌 다른 것”이 된다. 무형의 흔적을 포착하고 보존하려는 시도는 칭찬할 만 하지만, 그것들은 재현의 행위가 아니라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도전적인 것은 비물질적인 것을 언어적 표현으로 변환하는 것이 아니라 각 형태의 가치를 인식하고 그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에 있다.

우리가 그러한 비물질적인 흔적을 포함하기 위해 그것들의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기록을 고려하게 된다면, 우리는 아카이브가 무한하며 과거의 증거를 제공하는 자료의 일부만이 아카이브의 전통적인 영역에 수용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영구적인 자료는 일회적이거나 레퍼토리라고 불리는 것보다 더 학제적인 권위를 부여받아왔다. 이러한 우세함을 가질 수 있었던 하나의 이유로는 아카이브적 재현이 독자와 지식의 근원을 분리하는 반면, 레퍼토리는 의미의 전달을 위해 현존을 요구하고 그에 따라 접근하기 어렵고 주관적인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아카이브와 레퍼토리는 서로의 한계를 넘어선다; 그것들을 한 데 모아 함께 작동할 수 있게끔 함으로써 우리는 각각의 가치를 충분히 실현할 수 있다.

아카이브에 대해 논의할 때 퍼포먼스 과정의 중요성을 간단하게 반복하는 것은 유용하다. 아카이브는 단일한 완성된 결과물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많은데, 그러나 퍼포먼스는 최종 결과가 확정되는 상태에 놓이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아카이브는 보다 광범위한 작업의 일부인 퍼포먼스 이벤트에 ‘완전성’이라는 잘못된 감각을 강화한다. 퍼포먼스의 개별적인 예시화를 퍼포먼스의 창조 과정과 분리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며, 이러한 아카이브 모델에 맞도록 강요하는 것은 대표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 대신 우리는 퍼포먼스 그 자체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재해석됨에 따라 기록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모델을 탐구해야 한다. Verne Harris도 2007년 구전역사의 문화적 가치를 다루는 컨퍼런스에서 비슷한 주장을 내놓았다. 그는 넬슨 만델라 아카이브 운영의 난제에 대해 논하면서, 그는 아카이브가 보존되거나 고정적으로 유지될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의미와 유산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아카이브에 심문을 열어둘 것을 요구했다.

다시 사용하기 위해 아카이브를 열기
결론을 내기 위해 논의에서 도출되어야 할 두가지 요점은: 첫째, 아카이브는 전통적인 정의에 국한시키면 안된다는 것으로 - 우리는 비물질적인 흔적과 체화된 지식을 기록으로 인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퍼포먼스에 있어서 과정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재현과 아카이빙의 접근방식에 그러한 요소가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점에 대한 한 가지 답은, 우리가 아카이브에 두는 제한사항들이 재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범위 바깥의 기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활동은 경계를 지키고 유형의 권위를 주장하기 보다는, 다양한 형태의 가치있는 공존을 지향해야할 것이다. 만약 창조적 과정과 관객 경험이 동일하게 퍼포먼스의 필수적인 특징이 된다면 부유하는 순간을 포착하고 붙잡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 중요성을 유지하려면, 아카이브는, 언어와 같이, 변화에 열려있어야 하고 활발한 사용을 유지해야 한다.

퍼포먼스에 관련하여, 고정성은 많은 사람들에게 제한적 자산(요소)으로 간주된다. 우리가 기억과 다른 변형 가능한 형태를 더 적절한 것이라고 여긴다면, 퍼포먼스를 아카이빙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접근은 변화에 더 관대해져야 할 것이다. 유형의 기록은 시간이 지나면서 쇠퇴할 것이고 그것에 대한 해석은 상당히 달라질 것이다. 변화는 불가피하기 때문에 아카이브의 수사법은 수록되기 위한 고정적인, 안정된 기록의 개념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며, 심지어는 가변성을 장려해야할 것이다. 다른 분야를 살펴보는 것은 미래의 방향을 제시해 줄 수도 있다.

보존의 열쇠는 재사용이다. 기록은 그것들이 사용될 때 수행된다고 볼 수 있고, 기록에는 새로운 퍼포먼스 이벤트로서 재창조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아우스랜더는 퍼포먼스 기록의 수행성에 대해 탐구했다. 런던 연극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의 작업에서 살아있는 아카이브는 창조적 재사용을 장려하는 대표적인 예이다. 과거의 퍼포먼스 기록을 책장에 남기는 대신, 새로운 작업을 위한 영감의 원천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장려하기 위한 워크숍을 운영한다. Ruth Maclennan와 Gustav Deutsch와 같은 작가들의 작업은 아카이브 자료가 어떻게 재맥락화 될 수 있고 관객에게 재-제시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우리가 자료를 보관하여 가둬놓고 변화를 막는다면, 그 자료들은 빠르게 무엇과도 상관없어질 것이다; 아카이브는 오직 삶을 통해서만 유산으로 남을 수 있다.

우리는 기록 간의 대화를 장려하고 기록의 재-수행과 재맥락화 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그들의 관련성과 의미가 시간의 변화에 걸쳐 지도를 만들도록 해야한다. 악기와 장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바흐 콘서트는 18세기 리사이틀에서도 그랬듯이 현재의 관객에게도 동일하게 유효할 것이다. 기록이 주어진 순간의 분위기와 경험을 포착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만약 우리가 기록들을 재해석할 악보나 공식으로 본다면, 사람들이 과거를 이해하는 데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퍼포먼스는 라이브 이벤트다.: 우리가 만든 재현물과 퍼포먼스 아카이브가 적절한 반영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은 이 정신(퍼포먼스가 라이브 이벤트라는 것)에 입각해야만 한다.

인생 전체를 퍼포먼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썼듯이, ‘온 세상이 연극 무대다(사람들은 배우들이 극장에서 하는 것처럼 삶에서 수행해야 할 역할이 있다.)’, 퍼포먼스도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복합적인 상호작용과 이벤트의 연속이다. 우리가 만든 기록은 과거의 실재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할 뿐이다. 퍼포먼스 아카이빙에 부여되는 문제점은 디지털 아키비스트의 우려와 강력하게 공명하는데, 디지털 기록은 선천적으로 수행적이기 때문에, 정확한 코드를 입력했을 때만 데이터가 의미있는 결과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부유하는(덧없는) 현존을 포착하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적절한 시기와 적절한 방법으로 여러 요소들을 한 데 모아야지만 일어나는 것이며, 이는 모든 아키비스트의 주요 과제가 될 것이다. 퍼포먼스 연구자들은 퍼포먼스 재현 도전 과제를 다루는 아카이브 이론을 찾고 있다. 아마도 우리 역시 아카이브의 미래에 대한 대안적인 시각을 고려하기 위해 우리의 학제적 틀 바깥의 레퍼런스를 찾아봐야 할 것이다.


공간


공간-작가-관객으로 마련된 공유지
: 공간에 대한 생각과 김동희 작가의 작업

공간

1. 공간은 늘 존재해왔다. 사람들은 공간의 모든 곳에서 거주하면서 그 자신을 기준으로 상하전후좌우를 규정짓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공간은 구체적인 방향과 이름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은 자기 주변의 공간을 자신의 방식대로 구획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각자 어느 제한된 공간에 거했고, 이내 자신들의 약속과 합의를 기준으로 삼아 공간을 가졌다고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졌다’고 생각한 공간들은 그들이 지향하는 바에 따라 구성되었다. 구성된 공간은 구성하는 이의 표현 방식이자 입증 방식, 실현 방식이었고, 그 질서에 맞추어 배열되었다.

2. 배열된 공간에는 길이 있었다. 공간에 출발지와 목적지가 생겼다. 좌표와 그를 잇는 질서가 수립된 공간의 동선을 정하기 위해 사람들은 방향을 잡기 시작했다. 방향의 바탕에는 사람들이 공간을 해석하는 방법론인 신화와 종교, 자연의 흐름과 같은 것이 있었고, 그것이 흐릿해진 후에는 경험과 그에 따른 선호와 기피가 놓였다. 사람들은 공간에 받을 내딛는 순간부터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선택에 세계에 던져졌다.

3. 사람들은 항상 공간을 필요로 했다. 사람들은 공간에 대해 공간이 부족하다고 또는 공간 과잉이라고, 경우에 따라서는 공간 낭비라고 말했다. 공간은 늘 본래의 질량만큼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들의 필요를 기준으로 공간을 재단하면서 많게도, 적게도, 어느 때는 없는 것처럼 여겼다. 그중에서도 공간이 ‘없다’고 말하는 경우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공간을 인지하지 못했거나, 그들이 서로 합의한 약속에 의해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되었거나, 그 약속의 실효를 잃어버린 공간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공간은 늘 그대로였지만 사람들에 의해 시시때때로 늘었다가 줄기도 하고, 없었다가 다시 있곤 했다.

4. 사람들은 항상 공간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그 공간에 대한 반응은 매번 달랐다. 사람들의 반응은 처한 공간에서 발생하는 여러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 사람들은 공간을 사지(四肢)의 연장처럼 여기며 일체감을 또는 안도감을 느끼기도 하고, 반대로 낯설게, 버려진 듯이 느끼기도 했다. 사람들은 공간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처해 있었고, 공간과 사람들의 관계는 끝없는 변화를 거듭했다.



작가

1. 그는 아직 학생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을 때, 이 넓은 대학이라는 공간에 제 공간 한 칸 없을까 싶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판화과 4층 실기실 옆에 빈 공간을 발견했다. 벽 치고 문치고 창문 달고 페인트칠을 했다. 학교는 그 공간에 관심이 없었고, 그는 그 공간을 처음엔 작업실로 쓰다가 나중엔 살아보기도 했다. 새 집을 구한 뒤에는 전시장으로 공간을 쓰기 시작했다.

2. 졸업을 맞이한 그는 학교에서 하릴없이 방생되어 대학 앞, 서울(특히 마포구)이라는 도시공간을 누비기 시작했다. 그는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공간 사이사이에 엉성하게 놓인 빈 공간을 발견했다. 빈 공터에는 작은 무대를 세웠고, 쓰지 않는 계단 통로와 철로 된 셔터로 분리되어 막혀있었던 주차장에는 전시장을 가설했으며, 상가와 아파트 단지가 연결되어있지만 폐쇄시켰던 길을 개방하여 휴게공간을 마련해놓았다. 그는 있으나 없는 공간에, 다시 말해 분명 존재하지만, 사람들에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공간에 ‘진짜 있음’을 말했다.

3. 그는 빈 공간뿐만 아니라, 이미 용도가 부여된 공간에 머무르기도 했다. 주로 ‘전시’라는 용도가 부여된 공간이었다. 그는 전시의 목적에 맞게 모인 작업들의 상하전후좌우를 받쳐줄 공간을 제작했다. 그가 제작한 것은 다른 작업의 지지대이기도, 진입을 번거롭게 만드는 방해물이기도 했고, 작업의 감상을 위한 공간 그 자체이기도 했으며, 의자이기도, 바닥에 깔린 카펫이기도 했고, 전시장 입구의 개폐를 담당하는 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닫히도록 만드는 기계적인 설치이기도 했다. 심지어 공간 전체를 뒤덮는 것이 작업의 전부이기도 했다. 그는 하나의 목적/용도를 위해 존재하는 공간의 이곳저곳에 여러 가지의 것들을 덧붙여 공간 안의 공간을 조성했다. 그가 덧붙인 것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공간이라는 곳에 관습적으로 존재할 법한, 그래서 특별하게 인지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당신

1. A는 마포구의 폐쇄되었던, 그리고 일시적으로 개방되는 공간에 방문했다. A는 이러한 틈새 공간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드는 것과, 작가가 틈새 공간에 일시적으로 부여해놓은 역할들, 달리 말해 그가 만들어놓은 플랫폼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보았다. 죽은 공간이 살아나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A는 작가가 학교의 빈 공간을 어떻게 활용했는지도 잘 알고 있다. 그는 마포구의 빈 공간들처럼 교내의 방치된 공간을 수선해서 사용했었다. 잘 수선되어 무언가를 담을 수 있게 된 공간에 갖가지의 것들이 들어차는 것을 보았다. 그 안에는 A도 있었다.

2. B는 생활형 한옥 공간에서 진행되는 전시를 보았다. B는 작가의 작업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한옥 공간을 점령하고 있는 것은 흰색의 벽들이었다. B의 머릿속에는 화이트큐브의 흰색 벽면이 떠올랐고, 그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았을 때, 눈에 도드라지는 것은 흰색 벽면에 뒤덮이지 않은 문과 창문, 거울, 화분, 지붕과 같은 것들이었다. B는 이전에 이 공간에서 보았던 전시들의 경험 덕분에 공간에 걸렸던 오브제들의 순서에 따르는 동선의 방향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공간에 놓인 것은 공간 전체를 뒤덮은 흰 벽면뿐이었고, 새로 가설된 공간과 계단들로 인해 공간 전체가 한 면으로 이어지면서 B의 기억 속 동선이 흐트러졌다. B는 처음 한 번은 이전의 기억에 의존해가면서 의도되었다고 생각한 동선을 따라 걸어보았고, 두 번째에는 제 맘대로 이리저리 뛰고 넘어 다녀보기도 하고, 볕이 드는 자리에 앉아 오래 머물러보기도 했다. B는 전시를 관람하면서 이전 전시와는 집중하는 지점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전시 벽면에 걸린 무언가를 따라 걸으며 보는 것이 아니라, 막다른 길과 윗쪽 공간을 향해 놓인 계단을 괜히 올라보고, 물리적으로 연장된 바닥을 걷고, 펜스를 넘는 발걸음의 방향에 따라 달라지는 동선에, 그리고 여러 움직임의 순간에 마주하게 되는 공간의 면면들에 집중하는 자신을 느꼈다.

3. 집이 신림동인 C는 집에 가는 길에 위치한 공간에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고 호기심이 일었다. 미술, 전시와 같은 것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C는 전시가 무료인 것을 확인하고 시간이나 때울 겸 전시 공간에 들어섰다. 단번에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흑백의 흐릿한 사진들이 걸려있는 것을 보고 뒤돌아설까 생각했지만, 이내 ‘시간도 남는데 뭐’ 라고 중얼거리며 조금 높게 위치한 바닥에 발을 내딛었다. 빠르게 한 바퀴를 돈 C는 연접되는 부분을 찾기 어려운 사진들과 글을 보며 눈알만 데록데록 굴렸다. 사실 의미를 찾는 일이 귀찮기도 했다. C는 전시장 출입구 앞에 세워진 차단벽 같은 곳에 놓여있는 책자를 집어 들다가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사람들은 전시장 바닥에 높이를 부여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C는 자신이 딛고 선 한 뼘 정도 높은 바닥을 바라봤다. 다시 그 바닥을 오르고 내리며 또다시 한 바퀴를 돌고 전시장을 나섰다.



다시 작가와 당신과 공간

작가의 작업의 구성은 이렇다. 공간 – 작업 – 관객.

1. 공간 : 작가의 흥미를 끌었던 공간은 인간들이 합의한 질서에 따라 배열되어 있는 공간들 사이에 엉성하게 놓여있는 빈 공간이었다.
2. 작가(의 작업) : 작가는 빈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협의와 약속을 하고(또는 그냥 점거하고), 자신이 망상하는 공간을 시공한다.
3. 관객 : 작가의 상상이 실현된 공간에 들어가 몸을 움직인다.

김동희 작가의 작업을 생각하면서 공간, 작가(의 작업), 관객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까닭은, 작가의 작업을 해당 방식으로 설명이 가능한 것이 첫째, 더 이상의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 사족으로 느껴지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마지막 이유를 언급하기 전에 필자가 생각한 김동희의 작업에 대해 간략히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김동희는 빈 공간을 발견하고 그 빈 공간에 자신이 상상한 공간을 조각한다. - 빈 공간에 대한 것은 공간 이야기 3번에서 충분히 언급했다고 생각한다. - 비어있는, 따라서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공간에 김동희는 다시 공간을 조각해놓는다(작가 이야기). - 그 조각이 들어찬 공간 속에서 사건들은 발생하고 사람들은 돌아다닌다. - 공간 이야기 1번에서 말했듯, 그의 조각된 공간은 작가의 망상/지향에 의해 형상을 갖추었기 때문에, 그 움직임에 방향에는 작가의 의도가 함축되어있다. - 그러나 모인 사람들이 조각된 공간에서 무엇을 볼 것인지, 만질 것인지, 가로지를 것인지, 아니면 돌아설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그들의 몫이며, 애써 몸을 움직여 어디로 걷고, 오르고, 들어가고, 앉을지 결정하는 것 또한 그들의 몫이다. (저마다의 몫들이 이루는 것들의 일부는 당신의 이야기 부분에서 이미 언급했다.) 그 몫은 아마 저마다의 선호와 기피라는 주관적 요인으로 결정될 것이다. - 저마다의 몫들은 조각된 물리적 공간 위에 층층이 쌓인다. 공간은 그 층층마다 변화된 모습을 간직한다.

나는 조각이 공간 이야기 1, 2, 3, 4를 경험해보는, 달리 말해 우리가 공간을 재구성해볼 수 있도록 마련된 공유지라고 생각했다. 김동희의 공간은 한 면에는 빈 공간을 다른 면에는 사람들로 샌드위치처럼 끼어있다. 빈 공간 그리고 우리에게 달라붙은 중간의 공간에 맞닿은 우리는, 우리에게 달라붙은 그곳을 거닐며 빈 공간이 다른 모습으로 채워지는 것을 목도한다. 김동희의 공간은 매개체로서의 공간이 되어, 대상과 관찰 방식의 중간적 대상이 되고, 중간의 공간의 상하좌우에 선 인간에게 공간은 더 이상 자신을 품는 그릇도 아니고 단순히 주관적인 설계로 주어지지도 않는다. 그곳에서 우리는 공간과 다양한 관계를 맺는다. 김동희가 제시하는 공간은 그곳을 채우고 있는 개별 사물들을 제외한다면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세계가 된다.

나는 이 공간에 공간과 작가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를 조각해두었다. 물론 이 조각들은 내가 언어로 나타내고자 하는 논리의 구성을 위해 새겨진 것이다. 내가 의도한 방향이 은폐되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조각된 공간의 방향이 당신만의 주관적, 심리적 요인의 영향으로 조금씩 달라지듯이, 나는 이야기의 조각들이 당신만의 방법으로 새로이 조직되기를 기대한다. 이것이 마지막 이유다. 이야기의 조각들을 대면할 것인지 덮어버릴 것인지는 당신에게 달려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읽기를 선택했고, 당신의 움직임에 따라 생겨나는 것이 있다면, 알려주길 바란다.


번역


The Exhibitionary Complex, Tony Bennet (1998)
전시 복합체, 토니 베넷

토니 베넷은 박물관을 감금제도가 아니라 이와 나란히 발전한 다른 종류의 제도, 즉 ‘전시복합체(exhibitionary complex)’의 하나로 규정한다. 푸코가 대중적 처벌(단두대와 사형수)이 감금의 형태로 바뀌게 되면서 죄인의 신체가 점차 대중의 시선에서 물러나 근대적 감옥이라는 폐쇄된 감시망 안에 갇히는 과정을 추적했다면, 베넷은 그것에 반대되는 방향, 즉 오브제와 신체가 닫힌 사적 영역 내(수집가의 스튜디올로)에서 해방되어 권력의 메시지를 사회 전체에 새기면서 대중적 무대(박람회, 박물관)로 옮겨지는 과정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이 두 종류의 제도와 그에 따른 지식/권력 관계는 정확히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데, 흥미롭게도 역사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서 감옥의 탄생과 박물관의 모태가 되는 박람회의 탄생은 교차한다. 이는 단순히 역사적인 우연이 아니라 양자가 서로 영향을 미치는 관계에 있음을 의미하지만, 베넷은 감옥이 사회 전면으로 파급된 무수한 감시와 규율기제들의 표준화된 기술을 완성시켰다는 푸코의 주장과는 거리를 둔다.

베넷이 유지하고자 한 푸코와의 긴장관계는 푸코의 규율권력이 스펙터클을 철회함으로써가 아니라 전혀 다른 성격의 근대적 스펙터클을 통해 실현되었다는 인식에 근거한다. 이때 중요한 점은 바로 권력이 “대중을 통해서 그리고 대중에 의해서 실행되고 전달된다”는 것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엄청난 사회적 자본이 투여된 스펙터클 산업은 사회 자체가 스펙터클로 나타나는 경향, 특히 도시 전체를 조망하는 시도들을 활성화시켰다. 이러한 시선의 민주화는 “모든 사람에게 권력의 시선이 분배되는” 새로운 규율 권력의 체제를 태동시켰다. 기술적인 차원에서는 판옵티콘과 파노라마의 결합을 통해서 군중 자체를 궁극적인 스펙터클로 전환시킴으로써, 주체와 객체의 위치가 상호 교환되는 시선의 자기감시체제가 완성되었다. 이제 군중은 권력의 지배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스스로의 이상적이고 질서 잡힌 모습, 즉 모두에게 보여지는 자신의 모습을 내재화하여 스스로의 행동을 통제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그러한 스펙터클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증가했다는 점이다. 베넷은 박물관과 갤러리, 그리고 박람회가 근대 국가의 형성에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교육기관이자 문화기관으로서의 국가 개념을 만들어내는 기본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럼으로써 19세기 이래 박물관, 갤러리, 박람회는 모든 선진 국민국가의 예산 운용에서 우선적 고려대상이 되었고,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중대한 문화적 기술이 되었다. 요컨대, 박물관은 고급문화가 근대 국민국가의 새로운 통치기술 또는 사회경영 수단으로 편입되어 보편적인 사회 규범을 형성하는 데에 기여하는 과정, 즉 문화가 매우 “유용한 통치기술”로서 새로운 권력 형식으로 조직되어 가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통치수단이 “다양한 형태의 전술들”을 취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통치와 자아의 통치 간의 매우 밀접한 관계에 의존하게 되었다”는 푸코의 주장을 따른 것이다. 그럼으로써 베넷은 문화를 단순히 권력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규범과 형식에 변화를 야기하고 그 규범이 자발적인 것인 양 고착화시키는 프로그램의 원천으로 보았는데, 이는 고급문화만이 내면생활을 바꿈으로써 삶의 형식과 행동을 바꾸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서구 문화의 고유한 신념에 기대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베넷에게 관람객은 국가의 통치자일 뿐만 아니라 협력자인 셈이다. 즉 관람객은 권력의 스펙터클에 대한 목격자인 동시에 통치를 위한 보다 적극적이고 차별화된 역할을 부여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물들을 보기, 관객이 된 대중
베넷의 연구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관람객에 대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그는 관람객을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자 계급으로 구분하여 분석함으로써 어떻게 국가가 폭력의 동원 없이 노동자 계급의 군중들을 통제하였는지 설명한다. 서로 다른 계급의 관람객들이 만나는 공간으로서 박물관은 부르주아 매너의 전시장으로 기능하면서, 서로 다른 계급 사이의 시선의 상호교환 속에서 노동자 계급의 모방학습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그 비밀이었다. 덧붙여 이러한 과정에서 박물관이 19세기 당시에 백화점이 취했던 전략을 수용함으로써 ‘품위 있는’ 부르주아 여성 문화에 의해 노동자 계급 남성의 ‘저급한’ 문화를 ‘정화’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대박람회를 찾은 대중들은 기계연구소 박람회를 통해 적절히 행동할 줄 알게 된 노동자 계층의 대중들이었고, 그들은 예의 바르고 질서정연한 태도로 전시를 관람했다. 박람회에는 관람자들에게 요구되는 행동양식에 대한 책자도 놓여있었는데, 이는 ‘질서정연한 대중’이라는 전체적인 스펙터클의 즐거움을 감소시키지 않기 위해서, 실제로 스펙터클의 일부가 되기 위한 것이었다.

박람회는 노동자 계층과 중간 계층을 하나로 묶는 문맥을 제공했고, 노동자 계층이 그 안에서 경우에 맞는 행동양식을 배우게 되면서, 중간 계층의 발전적인 영향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대중을 형성하고 그 대중을 새로운 권력과 지식의 관계에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이처럼 복합적인 시선의 배치 속에서 박물관은 고급문화를 유용한 통치기술로 포섭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규율 안에 감금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이, 하지만 질서정연하게 돌아다니는 새로운 대중을 만들어낸 것이 대상(오브제)을 더욱 대중적인 문맥에 공개하여 볼 수 있게 하는 역사, 전시복합체라는 것이다. 전시복합체의 형성은 곧 노동자 계층을 도덕적·문화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새로운 기구의 탄생이었다.

전시의 규율과 장치들
베넷에게 박물관, 미술관 같은 전시복합체는 특정한 사물의 배치와 시각의 기술을 통해 시선을 통제하고, 역사를 가시화함으로써 지식을 통제하는 근대적 규율 장치이다. 미술관이라는 제도는 미술품을 특정 규율에 따라 분류, 배치함으로써 ‘공적 기억(역사)’을 만들어내고, 그 결과 미술에 강력한 규범과 권력을 부여한다. 즉 사람들은 미술관에 들어서는 순간, ‘미술’이라는 전제된 개념으로 작품을 바라보거나, 작품을 보면서 미술 개념을 확인하며, 사회적으로 승인된 그 질서들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박물관, 미술관은 유물과 작품을 수집해놓은 근대 이전의 컬렉션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근대적 시각 제도이다. 특정 계급의 기호에 따라 선택적으로 수집한 사물을 특정인들에게만 공개하는 사적 공간이 아니라, 모두가 공유해야 할 공적 기억을 가시화하는 사회적 공간인 것이다.

전시복합체가 만들어낸 재현의 공간은 일련의 새로운 규율들의 관계에 의해 형성되었다. 감금의 규율이 집합체를 감축된 개체로 만들어 그 개체들이 권력의 시선 하에서 통제를 받도록 했다면, 전시복합체의 규율은 ‘보여주고 말하기(show and tell)’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전시복합체의 규율은 대상물들을 하나로 묶어 선보이기 위한 초점을 일반화하는 성향이 있었다. 이는 박물관에서 미술품을 시대별로 구분된 전시실에 전시하고 시대적인 흐름에 따른 관람로를 설치하여 각 시대별로 특이한 회화적 관습과 그에 대한 ‘역사적인 발전’을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박물관이 컬렉션을 ‘역사적인 전체성의 통합적인 구성’으로 선보이기 위해 지질학, 역사학, 인류학 등과 같은 규율들을 도입하면서 사물과 민족의 시간적인 순서를 만들어낸 것이다.

예시로 인간 진화에 대한 전시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들이 그들의 역사는 완전히 부정된 채로,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이행하는 연결고리로만 소비되는 것이 있다. 전시의 규율 중 인류학은 19세기 후반 제국주의의 맥락에서 식민주의 서구 지식체계의 산물이자 이데올로기였다. 고고학과 인류학은 식민지와의 접촉을 통해 성장하였고, ‘식민지 타자’의 발견은 곧 ‘유럽 자신’의 발견이었다. 인류학의 발전으로 유럽인들과 다르게 생긴 원주민들은 이상한 몸을 가진 생명체이자 당시 인류의 기원을 밝히는 증거물로서 해부의 대상이었다. 또한 그들은 자연과 문화, 서구와 비서구의 문명, 민족과 인종을 구분해주는 미개한 민족으로서 역사 속에서 낙오자이자 타자로 여겨졌다. 박물관에서 인류학은 서구 문명의 역사를 미개인들의 역사와 연결 혹은 분리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원주민들은 박물관과 인류학의 결합과 다윈의 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위치와 진화론의 연속선상에 존재했으며, 진화가 아닌 ‘진보’의 수사법에 영향을 받았다. 이는 다윈의 진화론에서 진보의 이면으로서의 퇴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인종 계서제에 따라 해당 원주민들은 진화론의 직선에서 맨 마지막에 위치하는 존재였다. 즉 박물관은 빅토리아 시대의 진보 서사를 완성하는 곳이었고, 박물관의 전시품이 된 원주민의 유해는 인종주의의 근거가 되었다.

전시 규율이 만들어낸 재현의 공간은 두 가지의 역할을 성실해 수행했다. 첫째, 박물관은 각 분과학문의 ‘실험실’이었다. 박물관은 인류학, 고고학, 자연사 같은 역사과학이 구성하는 ‘과거’를 사고 가능하고, 인식 가능한 실체로 만들기 위한 ‘맥락’을 제공하는 실험실로 기능했다는 의미다. 둘째, 박물관 전시는 ‘과거’를 19세기 말 ‘대중문화’를 구성하는 한 요소로 만드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로써 박물관은 대중에 대한 통치의 새로운 전략을 제공해주었다. 다윈주의와 진화론의 자기장 안에서 박물관은 과거, 특히 ‘기억 너머 먼 과거’를 발견하고 생산하는 ‘기억기계’의 역할을 담당해온 것이다. 이러한 박물관이 설립한 질서들은 근대국가에 뿌리 깊고 지속적인 이데올로기적 배경을 제공했고, 그 배경은 여러 나라의 부르주아 헤게모니 전략에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기계 박람회에서는 전시의 강조점이 생산 과정에서 상품으로 옮겨가면서, 전시는 노동자 계층의 기술교육을 위한 도구에서 그들의 노동으로 만든 생산품 앞에서 깜짝 놀라게 되는 도구가 되었고, 이와 같은 상품과 제작 과정을 분류하는 진보주의 분류법은 민족과 인종의 관계에 대한 노골적인 인종차별주의 목적론적 개념에 덧씌워져, 박람회를 위해 실제처럼 만들어진 토착민 마을에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들을 거주시켜 프랑스 인류학의 살아있는 전시물로 삼는 지점까지 나아갔다.

이처럼 진보의 수사학이 달성한 결과물(박람회) 안에는 그들이 달성한 이상적인 결과물들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었다. 에펠탑과 같은 장소와 관련된 시선의 기술이 발달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민주화된 권력의 시선을 누릴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된 것이다. 에펠탑이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사이의 습관적인 분리’를 극복해낸다는 바르트의 말처럼, 에펠탑은 그 자체로 볼거리이면서 바라보는 장소가 되었다. 에펠탑 아래에선 지배적 시선의 객체의 위치에 놓였던 사람들이 그 위에선 주체의 위치로 순환하게 되는 것이다. 에펠탑은 그 높이만큼 작게 보이는 사람들을 하나의 풍경으로 만들고, 냉혹한 도시의 신화에 낭만적인 차원과 조화로움, 온화함을 더한다. ‘질서정연한 대중’이 ‘질서정연한 대중’이 만들어낸 풍경을 바라본다. 박람회와 발달된 시각의 기술이 부르주아 민주정치의 발전에 협조하며 군중을 통제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군중으로부터 통제에 대한 동의를 얻어낸 것이다.

베넷의 박물관 연구의 의의
베넷에게 박물관 연구는 전통적인 문화연구를 극복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전통적인 국가론이나 이데올로기론은 토대와 상부구조의 이분법에 근거해 의식에 대한 권력의 작용에 초점을 맞춘 반면, 푸코의 권력 모델은 수행방식, 즉 관습적 규범 및 매너의 통제에 관심을 둠으로써, 문화가 무엇을 ‘재현’하는가가 아니라, 문화가 실제로 예외적이거나 일상적인 차원에서 무엇을 하는지를 규명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푸코의 이해를 바탕으로 베넷의 연구는 박물관에서 가시화되거나 전시되는 부분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부분, 즉 통치기술의 다른 이름인 ‘정책(policy)’의 영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개입의 목적은 박물관과 관람객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지식이 생산되고 조직되는 박물관의 감춰진 공간과, 지식이 수동적으로 소비되는 박물관의 공적 공간이 분리된 채로 남아있는 만큼, 박물관과 관람객의 관계는 여전히 비대칭적이고 일방적인 것으로 규정되기 쉽다. 베넷이 박물관의 공적 공간 즉 관람객에게 개방되는 전시 공간은 ‘수동적인 소비’가 아니라 ‘통치에의 공모’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전환시켰다 하더라도, 이 통치에의 공모는 어디까지나 국가의 통치가 정하는 한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것과 질적으로 다른 정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베넷은 박물관과 관람객의 새로운 관계를 위해서 큐레이터의 역할이 바뀌어야 함을 제안한다. 즉 큐레이터가 지식의 특권적 지위를 전제로 한 독점적인 전시 기획의 전문가에서 벗어나 박물관 외부에 있는 집단들이 박물관의 자료를 활용해 박물관 내에서 ‘저자’로서 발언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박물관을 공적인 대화와 논쟁의 공간으로 전환시킴으로써, 베넷은 국가의 통치기술을 무력화시키는 길을 찾기를 기대한다.


문장


안되면 되는 거 해라 vs 안되면 되게 해라